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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책

가장 큰 선물(최용우) 햇볕15

by 최용우 2021. 6. 4.

  책 구입 책표지 클릭! <가장 큰 선물>326쪽 12100원 https://c11.kr/cyw05

 

<책소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가장 값진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장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하고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외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뿐만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사랑과 풍성함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큰 선물인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형통의 복을 누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썼습니다.

 

<추천사>

최용우 전도사님의 글의 특징은 첫째로 깊은 기도의 무릎에서 나온 글들입니다. 언젠가 전도사님 댁을 방문 했을 때 기도의 방석이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신 방석이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방석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깊은 교제 속에서 나온 글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잘 새겨져 있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진리를 사모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합니다.

둘째로 최전도사님의 글은 삶에서 그 깨달은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 됩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듣지만 때로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말씀의 삶인지 막연할 때가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전도사님의 글들은 이러한 이들에게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최전도사님의 글은 깊은 묵상으로 인도합니다. 쉽게 읽어지고 간략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영적 진리와 넓은 혜안이 있으며 높은 영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린 아이부터 진리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더 깊이, 넓게, 높이,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기에 이 책을 추천합니다.

남도의 끝자락 작은 섬에서 이정태 목사 (완도성실교회 담임)

 

<목차>

1부-가장 큰 선물

2부-지금 나무를 심으라

3부-한 가지씩만

4부-내 속에 있는 것들아

5부-지금 행복하라

6부-복 있는 사람

 

<내용 맛보기>

 

1.가장 큰 선물

 

수능(대학입시수학능력시험)을 치루는 날 아침 고3 딸에게 여기저기서 시험을 잘 보라는 의미로 선물을 막 줍니다. 엿, 찹쌀떡, 인절미, 초콜릿, 한 사모님은 문제를 술술 잘 풀라고 ‘술술잘풀리는 화장지’를 한 덩어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빠인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한 후에 하나님의 ‘꿈’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시다고 한다. 너를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로 만들고 싶으시다는구나. 이 꿈은 오래 전부터 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아빠의 마음에 감동으로 주신 것인데, 이번에 붙잡아라. 하나님이 당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너를 반드시 oo대학에 보내 주실 것이다. 네가 ‘예 주님.’ 하고 꿈을 붙잡으면 넌 반드시 간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꿈과 환상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고, 환상이 있는 사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야 될 이유이기 때문에 꿈을 이룰 때까지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라고 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인 ‘꿈과 환상’을 신문을 보다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붙잡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30년을 한결같이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이 끝나는 날 까지 변함 없이 달려가다가 꿈의 열매를 내가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모세처럼 그 입구까지 가서 멈추게 된다면 후손들이 그 열매를 따겠지요.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면 ‘술술잘풀리는 화장지’보다도 더 인생이 잘 풀립니다. 태풍이 나를 덮쳐온다 해도 겁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원하는 사람 누구나 주십니다. 다만 간절히 찾고 간절히 원하고 그것을 붙잡고 싶어 하는 이에게만 주십니다.

 

2.오늘 하루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충만한 참 좋은 하루입니다.
오늘도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리고 형통한 하루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평안한 하루입니다.
오늘도 믿음 소망 사랑으로 더불어 행복한 하루입니다.
오늘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하루입니다.
오늘도 섬기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하루입니다.
오늘도 배우고 익히고 공부하고 진리를 깨닫는 하루입니다.
오늘도 마음이 평화롭고 기쁘고 즐겁고 여유로운 하루입니다.
오늘도 꽃이 피고 별이 뜨고 꿈을 꾸고 노래하는 하루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감격스러운 하루입니다. 
 

3.가득 차고 넘치는

 

목사님이 교인 집에 심방 가서 꼭 하는 기도가 “하나님 이 가정에 물질이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일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한번은 대 심방 기간에 목사님과 권사님과 제가 한 팀이 되어 심방을 다니는데, 목사님은 설교를 하시고 권사님과 제가 번갈아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권사님은 그 가정에 온갖 축복을 있는 대로 쏟아 부으며 기도하셨는데, 저는 그 가정의 여러 가지 형편을 아뢰며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 담담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를 하는 순서인 집에서 설교를 마치신 목사님은 “하나님 이 가정에 물질이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일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권사님이 대표로 기도할 때는 권사님이 그 기도를 하시기 때문에 목사님은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았지요. 심방을 가서는 반드시 “하나님 이 가정에 물질이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일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가정에 물질이 차고 넘치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 ‘차고 넘치는’ 물질적 신앙관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세계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차고 넘치는 ‘자본’으로 약소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자본주의적 물질관입니다.
진정 우리는 무엇을 차고 넘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가정에 차고 넘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이고 임재와 다스림입니다.
뭐, 그래도 여러분의 가정에는 물질이 차고 넘치면 좋겠죠?

 

4.나를 안고 가세요

 

청년 때 다니던 교회에서 4박5일 동안 심령부흥대성회를 했습니다. 오신 강사 목사님의 코가 어찌나 큰지 교회 할머니 권사님 “아이고매 목사님 코가 참 텀턱스럽게 크네.” 하면서 감탄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귀에 꽂혀 저는 부흥회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계속 목사님 코만 보고 코에 대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며 ‘코 묵상’을 했습니다. 그 묵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목사님의 성함이나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데 코만 생각납니다.^^
당시의 부흥회는 밤늦도록 계속되다가 새벽기도를 위해서 밤에는 거의 예배당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잤습니다. 일부 열심당들은 강대상 앞쪽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비몽사몽, 자는 것도 아니고 안자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로 밤을 샜습니다.
그런데 거의 잠결에 아까 그 권사님이 “나를 안고 가소서. 예수 서방님, 나도 안고 가소서. 안고 가소서. 내 서방님은 나를 안아주지 않았는데, 예수 서방님 안아 주신다니 나 좀 안아주소서. 나 좀 안고 가소서...” 하는 기도 소리가 마치 환영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멍 한 상태에서 ‘아이고 우리 권사님, 노망 나셨네. 예수님이 어떻게 쭈그렁 할망구 권사님을 안고 간당가요. 꿈깨소. 저기 있는 이쁜 김자매 라면 모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나운 아모리 족속과 아낙 자손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너무 무서워 오줌을 질금거리며서 덜덜 떨고 있으니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셨도다”(신1:3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안고 안전하게 위험지역을 건너가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권사님은 저녁 설교를 들으시고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나도 좀 안고 가소서”

 

5.새로운 전도 방법

 

언젠가 교회에서 전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전도부흥회’를 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은 한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전도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면서 실제로 밖에 나가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하는 동안 새 신자가 많이 등록했습니다. 한달만에 다 빠져나가 원상복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한번 동기부여가 되면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저는 ‘기뻐하는사람들’이라는 노방 전도팀을 만들어 매주 토요일 지금은 없어져버린 안양의 벽산백화점 앞에서 전도지를 뿌리며 전도를 했습니다. 손글씨로 직접 써서 만든 전도지를 거의 100만장 이상 인쇄해서 뿌렸습니다.
그렇게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지요. 내가 이렇게 해서 실제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구름처럼 다 흩어지고 얼마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비처럼 내려야 사람들의 옷이 젖겠구나! 그렇게 하려면 전도의 밀도를 높이고 집중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방전도를 중단하고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의 특기를 살려서 깊이 있는 영성적 전도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생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실제로 속마음까지 전할 정도로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한 제자들은 겨우 열 두 명이었고, 그 중에 한 명은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끌어당겨 교회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한 단계 더 깊이 있는 전도는 나 자신이 전도되는 일입니다. 나 한사람이 성화를 이루어 온전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전도는 작가에게

 

1862년에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불행한 사람들)’은 그동안 수많은 뮤지컬과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상영되고 있습니다.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은 우리나라에서만 590만명이나 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화는 카톨릭 배경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590만명의 가슴에 뜨거운 복음을 감동적으로 심는 일이 보통일입니까? 물론 복음을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복음을 듣는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듣다보면 믿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신학자나 목사가 합니다. 그러나 이를 전파하는 방법은 작가가 해야 합니다. 브라우닝, 휘트먼, 칼라일 같은 작가가 펜 한 자루를 휘둘러서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밭에서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펜 대신 자판기 하나를 의지해서 열심히 ‘글’로 사이버 세상에서 그리고 책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충성스럽게 꾸역꾸역 감당할 것입니다.

 

7.여관과 사랑방

 

“당신 꿈이 무엇이야?” 하고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경치 좋은 곳에 예쁜 집을 지어놓고 지친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쉬었다 가게 하는 것”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팬션을 하면 되겠네.”
“저는 돈을 안 받고 무료로 쉬었다 가게하고 싶어요.”
“에고, 그럴려면 당신 남편이 무지하게 돈을 많이 벌어야 하겠네.”
“알았으면 빨리 가서 무지하게 돈을 많이 벌어오셔.”
조선말엽에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이 당황스러워했던 것 중에 하나가 조선에는 어디에도 ‘여관’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조선 사람들도 여행을 했을 터인데 타지에서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숙식을 해결했을까요?
주막은 술집이지 여관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여관이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좀 여유 있게 사는 집 문을 두드리며 “이리오너라!” 하고 외치면 문이 열리고 그 집의 ‘행랑채’또는 ‘사랑채’에 들어가 먹고 자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채는 여행객이나 잠잘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개방된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돈과 권력과 권세와 재물을 가진 부자들이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Oblige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 조선의 ‘사랑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곧 이어 서구 자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하면서부터 ‘돈’이 안 되는 사랑채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돈이 되는 ‘전세, 월세’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소원하는 ‘경치 좋은 곳에 예쁜 집을 지어놓고 지친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쉬었다 가게 하는 집’은 사라져버린 ‘사랑방’을 부활시키고 싶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8.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그것만큼 뻘쭘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아마도 다시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질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을 부탁했을 때 상대방이 거절을 하면 괜히 부탁한 사람이나 거절한 사람이 서로 무안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이 있었는데, 기도를 한 사람이 별로 관심이 없다면 기도를 응답해 주신 분이 얼마나 뻘쭘할까요? 기껏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부탁한 사람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부탁을 들어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면 이거야말로 허망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다음부터는 아무리 사정해도 내가 들어주나 봐라. 괴씸한 놈’ 이라고 생각 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응답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서 감사의 마음이 확 올라오지 않는 경우는 왜 그런가요?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 주었더니 “이건 우연히 된 거야.” 한다면 주었던 것을 다시 빼앗아버리거나 엉덩이를 발로 차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기도에 응답을 받고, 받았으니 좋아서 감사를 하고, 감사하니 기분 좋아 더 주시고, 더 받으니 찬양이 절로 나오고, 찬양을 받으니 또 주시고, 또 받으니 할렐루야!
이런 아름다운 기도 응답의 선순환이 무한 반복되는 인생을 산다면 참 좋지 않을까요? 안 그렇습니까?

 

9.파루시아

 

주일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옆에 앉은 사람들과 ‘올해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올해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저는 신나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 시큰둥한 반응은 뭐지? “그래, 내가 주인공이야. 너는 조연이고” 이런 싸한 느낌?
주인공이든 뭐든 하려면 무대의 막이 올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무대의 막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무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맹렬하게 하는 곳입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으면 주인공의 대사를 외우며 준비해야 하겠지만, 지나가는 행인1. 2나 하려면 그냥 펑펑 노세요.
파루시아! - 아직 이 세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시키실 그 순간이 ‘파루시아’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순간이 ‘파루시아’ 입니다. 파루시아의 때가 오면, 입시지옥이 사라질 것입니다. 암환자도 새로운 몸으로 탈생 할 것이고, 돈이 필요 없는 세상, 모두에게 최고의 집이 제공되고,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없고, 빈익빈부익부도 없고, 우울증이나 자살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뒹굴면서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독사는 아이의 장난감이 되고, 아무도 사람이 사람을 속이거나 사기치지 않는 완전한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 ‘파루시아’의 무대가 열릴 때, 인간은 그 순간의 영적 상태를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영생’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이라면 어린아이로, 장성한 신앙이라면 장성한 역할로, 영적 성숙을 이룬 신앙이라면 성숙한 성인으로 영생할 것입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이 땅에 있을 때 바로 지금 뿐입니다.


10.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때에도, 열두해 혈루병 여인 앞에서도, 눈먼 소경 앞에서도, 푹풍우치는 호수에서 제자들이 다 죽겠다고 고함치는 옆으로 예수님은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불러 주기를 바라며 멈짓거리는 발걸음입니다. 누군가 보아주기를 바라는 발걸음입니다. 누군가 붙잡아주기를 원하는 그런 능청스런 걸음입니다.
“예수님” 누군가가 예수님을 부르면... 들은 척도 안 하시고 그냥 지나가십니다. “예수님! 예수님!” 그래도 고개조차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아이고 예수님 제가 죽겠나이다! 제발 저 좀 봐주세요.” 그제서야 예수님은 발걸음을 돌리십니다. 누가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해보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도도하고 고고하신 분이셔서 나의 자존심과 에고(ego)가 무너지기 전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어디를 봐도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만나주신 경우가 제자들을 부를 때 외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거리에서 지나가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내 눈 앞을 지나가십니다.
나를 좀 발견해라. 나를 좀 찾아라. 나를 좀 불러 보아라. 하시면서 지나가십니다. 봄에도 지나가고 여름에도 지나가고 가을, 겨울에도 지나가십니다. 오늘도 지나가십니다. 고개를 들고 저기 저쪽을 좀 보세요. 예수님이 저기 지나가고 계시잖아요.

 

11.무엇을 먹었습니까?

 

육식 -저는 오늘 아침 흑미밥과, 두부를 넣은 김치국과, 고등어자반 한 조각, 부추김치, 잘 익은 신김치를 먹고 사과 반조각을 먹었습니다. 아침식사는 주로 채식 위주로 합니다. 아내는 음식에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기 때문에 담백하고 뒷맛이 깔끔합니다.
점심은 열라면에 녹차잎과 양파 반개를 썰어 넣었습니다. 물을 세 컵 정도 넣어 라면을 끓인 다음 물을 반정도 따라버리면 라면을 튀긴 팜유가 대부분 사라지고 느끼한 라면맛이 담백해집니다.
저녁은 흰밥에 감자탕을 한 대접 먹었습니다. 아침에 먹었던 신김치와 부추, 그리고 부르클리를 데쳐서 초장과 찍어먹었습니다. 닭꼬치 한 개와 무생채 한접시, 밥을 다 먹고 곳감 한 개를 먹었습니다.
영식 -저는 오늘 아침 출애굽기 37장을 읽고 원고지 500자 정도로 요약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 하시면서 성소를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꼼꼼하심과 모세의 무조건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무조건 순종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점심은 컴퓨터 모니터 아래 있는 말씀카드에 적인 마태복음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큰소리로 읽고 “예 하나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하고 화살기도를 했습니다. 저녁은 그냥 굶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느라 말씀 읽는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침은 꼭 먹는데 저녁은 거의 날마다 굶는 편입니다.
저는 날마다 육신을 위해서 음식을 먹고, 영혼을 위해서 말씀을 먹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면,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자주 굶고, 건너뛰고, 부실한 식사로 제 영혼은 지금 너무나 파리합니다. 음식을 먹는 육체는 영양과다로 비만인 반면에, 말씀을 먹는 영혼은 영양부족으로 너무나 말라있습니다. 굶어죽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입니다. 저 어떡하면 좋습니까?


12.오만 것을 다 먹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전라도 장성이라는 깊고 깊은 산골짜기 겨우 20여 집이 산 밑으로 쪼루루 몰려있는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계절마다 따먹고 주워먹었던 것들의 맛과 모양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칡뿌리를 캐서 질겅질겅 씹고 다녔고, 산딸기, 송아, 오디, 머루, 다래, 뿌지뽕, 더덕, 잔대, 싱아, 맹감, 기염 같은 열매들을 따먹었습니다.
물고를 더듬어서 미꾸라지, 메기, 불무개, 기름장이, 붕어를 잡아먹고 논우렁, 새알을 주워 먹기도 했고, 개구리, 두더지, 산토끼를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간식거리는 산과 들에 널려 있었고 친구들과 다니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오만 것을 다 먹으며 놀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먹었던 것들이 오늘날 특별식으로 귀하게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며 그때는 가난한 시절이라 먹을 게 없어서 먹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먹었던 것들이 오늘날 내 건강의 밑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나의 어린 시절보다 100배는 더 잘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게 도무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자장면을 만들면서 MSG를 국자로 막 퍼 넣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먹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감칠맛인 MSG는 인공으로 만든 ‘가짜 맛’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사망원인 1위인 ‘암’은 아직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입니다. 음식에 엄청나게 퍼 넣는 화학조미료가 암의 원인입니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 엄청난 로비를 통해서 암의 원인이 인공조미료인 것을 발표하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자연이 준 열매들과 먹거리를 안심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덜 오염된 옛날의 소박한 세상이 새삼 고맙고 그립습니다.


13.실천의 종교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인들은 말만 잘하고 행동은 안 해. 물에 빠지면 주댕이만 둥둥 뜰거야.” 이런 말을 듣습니다.  왜 기독교가 ‘말쟁이 종교’가 되어버렸을까요?
기독교 지도자들(목회자들)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이성과 지성이 발달하고, 자꾸 논리적이고 이성적, 지성적 설교를 하다 보니 듣는 사람들도 덩달아 이성의 기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굉장히 높은 수준의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성과 지성이 발달하면 그것이 믿음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하게 합니다. 자꾸 따지고, 회의하고, 의심하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합니다. 그냥 믿으면 될 것을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원어에 맞추어 보고, 무슨 學에 대입해 보고, 무슨 설에 비추어 보고 하다보면 점점 이상해지다가 나중에는 ‘믿지 못하겠다. 고로 신은 없다’로 결론이 납니다.
어느 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름조차도 복잡한 사람)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변증법을 정형화한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말장난을 하기 시작하더니 기독교 진리를 엄청 복잡하고 괴상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한 사변적 해석은 기독교에 대해 따분하게 느끼던 사람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보이지 않는 한 흐름을 형성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저 ‘실천’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종교인데, 기독교가 학문적인 연구와, 논의와 사변에 빠져 ‘학문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공부 좀 그만 하고 공부한 것을 한 가지라도 실천해야 말쟁이 종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14.예수로 거듭난 사람은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의(義)로운 분이심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옳은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요일2:29쉬운성경)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싫어하시는 일을 피하려고 전심으로 애를 쓰면서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살고자 애를 쓰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친구라는 인정을 받기를 사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다른 한 악한 지배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가로막으며,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 악의 세력에 본심으로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혹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의심의 자리에까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원하여서나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고 고백하면서 벌떡 일어납니다.

 

15.찬양의 능력

 

19세기의 ‘빌리 브레이’는 광부였으나 나중에 회심을 경험하고 복음전도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가 임종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결코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 나의 주님은 사망을 이기셨도다. 만일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예수께 영광! 영광! 이라고 외쳐 무저갱에 울려 퍼지게 하겠다. 그러면 늙은 사탄은 ‘빌리,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가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영광을 외치며 하늘나라로 올라가겠다. 영광! 주님을 찬양하라!”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 속에 사실은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찬양’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도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 성도들이 다함께 찬양을 하면서 찬양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질 때에는 기독교가 활성화가 되었고, 찬양이 약해지면 교회의 힘도 약화되곤 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경배와 찬양’은 찬양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반면에, 성도들의 입에서 익숙한 찬양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입으로 부르고 몸으로 움직이는 찬양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찬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온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 따라 춤을 추면서 부르던 찬양이 몇몇 찬양단 젊은 형제자매들의 몸짓에 맞추어 어색하게 율동을 해야 하는 수동의 찬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찬양은 예수 믿는 신자가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영혼이 약간만 깨어 있어도 찬양을 할 때 내면에서 하나님의 영이 기뻐하시며 춤을 추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6.내가 성경을 읽는 방법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레노바레성경, 메시지성경, 쉬운성경, 공동번역성서, 킹제임스한글판 성경을 펼쳐놓고 순서대로 읽습니다. 최근에 새로 나온 ‘쉬운말성경’까지 모두 6권입니다. 성경 한 장씩 6권의서로 다른 문체로 번역된 성경으로 읽다보면 성경이 굉장히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전에는 한글성경버전 12개를 동시에 펼쳐놓고 본적도 있는데 너무 많으니까 복잡하고 책상이 좁더라구요. 그래서 요즘엔 12버전 성경은 스마트폰 어플로 깔아놓고 필요할 때만 보고, 책으로 된 성경은 반으로 줄여서 6권만 보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 한 권으로만 읽으면 이해가 안 되고, 딱딱한 문체에 금방 질리고 맙니다. 그런데 메시지 성경은 마치 설교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고, 쉬운 성경은 마치 어린이책을 읽는 듯한 단순함을 주고, 공동번역성경은 한문투의 단어를 한글단어로 바꾸어 놓은 듯한 느낌을 주고, 킹제임스성경은 짜임새 있는 느낌을 주고, 쉬운말성경(성서원)은 아직 몇 장 안 읽어 봐서 특징을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에 빨강색연필로 밑줄을 그었는데, 요즘에는 모든 성경에 그냥 밑줄을 긋습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부분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성경을 읽을 자유만 있지 성경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전에는 성경을 한절 한절 꼼꼼하게 보았다면 요즘에는 한 장씩 전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게 보니 성경의 어느 한 절, 한 장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더군요. 설교를 할 때도 성경을 자잘하게 쪼개지 말고 한 장씩 통으로 본문으로 잡아서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7.폼나고 근사하게

 

밤에 밖에 나갔던 큰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습니다. 골목길 전봇대 옆에 어떤 어른이 서서 창피한 것도 모르고 노상방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번개처럼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교양도 없이... 그게 뭐에요. 술을 마시고 취하면 사람의 수준이 한 참 떨어지는 것 같아요.”
원초적인 본능을 다스리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어린 사람입니다. 아기들은 사람들이 보든지 말든지 아무데서나 똥이 마려우면 그냥 뿌직뿌직, 눈에 먹음직스러운 것이 있으면 사 줄 때까지 울고불고, 기분 좋으면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흔들고 지 멋대로 잖아요. 어리기 때문입니다. 점점 자라면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한 구분과 절제와 인내심을 배우면서 인간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신앙의 세계도 수준이 있습니다. 신앙의 수준은 육체적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초등학생의 신앙 수준이 어른보다 훨씬 높을 수도 있고 똥을 싸서 깔아뭉개는 갓난아기 같은 어른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잘 먹고 잘 자란 사람이 건강하고 높은 수준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보다는 세상이 주는 부스러기를 더 탐하고 굶주림을 면해보려고 껄떡거리는 사람은 그 영혼이 너무나 초라하고 파리합니다.
사람은 육신의 배부름과 만족만으로는 살 수 없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 말씀을 먹고 배부르기 전에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육신을 위하여 끊임없이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껄떡거리다가 결국 영혼이 배고파 죽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수준 높은 인격을 가지고 폼 나고 근사하게 살고 싶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말씀을 먹고 영이 배부르고 만족함을 누려야 합니다.


18.개똥금지

 

날씨가 풀리니 쌓여있던 눈이 녹아 눈 속에 감추어져있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여보 여보 여보 조심해 조심 사방에 개똥이야 여긴 개똥밭인가봐. 얘들아 너희들도 아무거나 발로 차지마. 다 개똥이니까..”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와 차를 타기 위해 가다보니 골목이 온통 개똥천지입니다. 길거리 전봇대에 누군가가 <개똥금지. 신고한다>고 신경질적으로 글씨를 써서 붙여 놓았길레 웃으며 사진을 찍었었는데, 이 골목에 사는 사람이라면 저런 글씨를 써 붙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이 추운 겨울날 걸어서 집에 가는데 길모퉁이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바람막이 포장을 쳐놓고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포장 앞과 양옆에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써 붙였는데, 초등학교 1학년생이 쓴 것처럼 서툰 글씨가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반사되어 너무나도 따뜻하게 보이더라는 것이지요. “아! 얼마나 훌륭한가. 이 글씨는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반갑고 따뜻한 것인가! 부끄럽다. 내 글씨는 저 ‘군고구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 아닌가”
<개똥금지. 신고한다>는 글씨 속에는 개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의 불편한 심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군고구마>라는 글씨 속에는 삶의 절실함과 팍팍함과 고단함까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단어 하나를 쓰더라도 무심코 쓰거나 습관적으로 쓰지 말고 절실하게, 절박하게, 치열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는 사람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엄벙대며 대충 살아서는 안 되는 세상 같습니다.

 

19.기독교와 보수

 

어떤 중견기업이 불황에 침체되어 매출이 뚝뚝 떨어집니다. 회장은 임원들을 소집하여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댑니다. “혁신!... 창조적 생각으로... 구태를 벗어버리고...”
한 나이든 임원이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한 마디 합니다. “회장님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으로 바꾸시지요.”
그러자 회장은 “그딴 복잡한 기계가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요. 나는 이 손전화를 10년째 사용하고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소. 이런데 신경을 쓰기 보다는 어떻게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지를 고민하면서 생각좀 하란 말이요.” 그러자 거기에 모여 있던 임원들 10명이 일제히 주머니에서 최신 스마트폰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회장님만 바꾸시면 됩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들라면 ‘보수화’일 것입니다. ‘보수’라는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함’이라고 사전적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에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정통 전통’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수’가 ‘보수화(保守化)’가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장로교는 대부분 ‘평양대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따릅니다. 다른 비슷한 이름들도 사실상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갈라져나갔기 때문에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었던 1907년은 전국적으로 독립군들의 의병활동과 애국운동이 절정에 다달았던 시기입니다. 일제는 독립군의 활동거점인 교회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은 일제의 협조가 없이는 선교활동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이 아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 기획된 초대형 이벤트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었습니다.
일제와 선교사들의 의도는 딱 들어맞아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이 약자편에 서서 ‘독립운동’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강자와 권력 편에 붙어서 서서히 기득권을 형성하게 되고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세속적 기복주의와 천박한 상업주의로 전락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람들이 보기에 ‘현실 인식이 거의 없는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보수화 된 교회는 오늘날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현실권력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 있을 뿐, 권력자들이 싫어하는 내용은 입도 뻥끗하지 못합니다. 성경만 가지고 설교를 하고, 예수 믿고 축복 받고 부자 되자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니 설교가 무슨 뜬구름 잡는 것 같고 ‘공산당의 선동’같이 느껴집니다.

문제는 규모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전부 보수화의 줄에 한 줄로 쭉 서서 그 줄의 길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최신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터치하며 온갖 짓을 다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아직도 버튼을 꾹꾹 누르는 핸드폰을 가지고 아직 불편함을 못 느끼겠다고 그것이 최고라고 선전을 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20.기독교와 미래

 

에든버러 대학 앤드류 월즈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①유대시대- 구약시대
②그리스, 로마시대- 신약시대
③이민족시대- 기독교 확장기
④서유럽시대- 종교개혁 이후
⑤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 - 청교도 미국 이주 이후시대
⑥타 문화 전달시대 -21세기 현재
각 단계의 특징은 당대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환경 및 문화와 기독교의 밀접한 교섭을 통해서 기독교가 시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의 생명력 유지와 발전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와 동질이 되었다가 기독교가 중심이 되곤 했다는 것입니다.
⑤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 시대에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냥 ⑤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⑥타 문화 전달 시대입니다. 즉, 유럽(미국)기독교가 쇠퇴하고 제3지대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기독교가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매우 짧은 한국교회는 ⑤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에 머물러 버린다면(바로 수구 보수) 21세기에 새롭게 도래하는 ⑥타 문화 전달 시대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도태될 것입니다.
흔히 한국 기독교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량위주의 ‘자본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미국신학의 아류에 불과할 뿐,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덩치 큰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⑤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의 끝물로 조용히 사라져 갈 것인가... ⑥타 문화 전달 시대로 넘어가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될 중요한 시점입니다.
다행인 것은 수구 보수주의자들이 자식들에게 당회장 자리를 대물림하며 ⑤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의 끝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그 이면에서
기독교의 변방에 있는 이들이 조용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북소리를 울리기 시작하면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기독교 노숙자들의 눈이 번쩍 뜨이겠지요?

 

21.기독교와 예배

 

문제하나 내겠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물어보나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없는 기독교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예배는 인간들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주도하시고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예배를 저는 ‘주부적 예배’라고 이름 붙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고 인간은 그저 조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視空間)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으시며 무한광대(無限廣大)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공이신 그분을 대기실에 모셔놓고 우리끼리 웃고 까불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처럼 1년 52주 변함 없이 딱 정해진 큐시트(cue sheet)를 따라 기계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용도 목사(1901-1933)님이 길선주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셨답니다. 신령한 분이 오셨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그런데 예배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용도 목사가 기도실에서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설교 없이 찬송만 하다가 끝냈습니다. 한참 만에 기도실에서 나온 이용도 목사가 한 말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님 교회에서는 별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답니다.”
기독교는 내면의 종교이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에 민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 인간들이 기획하여 제작한 쇼(show)같은 예배를 통해서 영적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루 3시간 이상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말씀을 받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설교 준비를 하는 목회자는 설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22.기독교 노숙자

 

서울로 공부하러 다니면서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가끔 노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한 분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군요. 그분은 집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집에 안 들어가는 이유는 “여기가 편해요.”
과거에는 교회에 다녔었는데 지금은 안 다닌다는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래도 교회에는 다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면 “다닐만한 교회 좀 소개해 주세요. 기존 교회들은 너무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 좀 소개해 주세요.”
교회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데 마땅히 다닐만한 교회가 없어 밖으로 떠도는 기독교인들을 저는 ‘기독교 노숙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의외로 기독교 노숙자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사방 천지에 고개만 돌리면 십자가가 보일 만큼 교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다닐만 한 교회가 없다니...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한국 기독교는 보수를 신앙의 ‘정통’으로 여깁니다. 정권과 결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보수파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세속적 기복주의와 천박한 상업주의로 전락시켰습니다. 세상은 초 단위로 변하는데, 과거의 전통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보수’가 얼마나 답답해 보입니까? 성경에도 없는 ‘교회성장’이라는 귀신이 한국교회의 주를 이루고 있는 한 그 누구도 한국 교회에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 밖에 떠도는 기독교 노숙자들이 모두 ‘별 볼일 없는 신앙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내면의 종교인데,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에 민감한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영적 흐름이 없는 쇼(show)같은 예배를 통해서 영적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뛰쳐나가 ‘영적 노숙자’가 되는 것입니다.


23.성령에 취해


외출했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 골목길에서 혼자 놀고 있네요. 무슨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하늘에 대고 삿대질도 하고, 에잇! 하며 발길질도 하네요.^^
“이노므르 에르 에잇! 내가 못할게 가어? 에잇! 으르르릉... 뭐? 내가 웃겨? 나 술 안 취했다 이거야. 응? 나 몰라? 나 승만이야 승만이... 내가 왕년에 말이야 개잡아 먹고.... 그리고....”
하도 재미있어 가만히 서서 들어봤습니다^^
술취한 사람은 지금 분명히 자기가 잘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도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못하는 소심한 남자 같은데, 술이 들어가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알콜 때문에 입과 혀가 꼬여서 에잇! 에잇! 하는 소리를 하며 혀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잘 안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에베소서5:18에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은 약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년 때 꽤 유명한 금식기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집회를 할 때였는데, 정말 그 기도원에서 방언을 못하면 창피할 정도였습니다.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거의 기도도 안 될 만큼 막막한 때라 저는 멀뚱거리며 다른 사람들 기도하는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따따따따따따 따따따따따.” 오토바이 기도
“훌라라라랄라라라라 훌라라라라라라랄...” 훌랄라 기도
“아바바바바바바바... 아바바바바바바...” 아바바 기도.
그리고 러시아말 기도,
아랍말 기도,
뭘 자꾸 깐다고 까 까 까 하는 일본말 기도...
온 세계 사람들의 말이 다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 기도하는 모습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입에서 “우엉 우엉 우엉 우러러럴럴 러렁 러렁...”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누군가 제 혀를 강제로 막 비틀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 안 돼 정신 차려 용우야...  했지만
누군가가 ‘다른 사람 기도하는 거 보고 웃지 말고 너도 해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으를르르를르르를를....” 하면서 방언을 하는데, 그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한 답이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흘러가면서 묘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더 큰소리로 “으를르르를르르를를.... 으를르르를르르를를....으를르르를르르를를....으를르르를르르를를....”
어떻게 기도가 끝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고 기쁨과 환희에 넘치는 얼굴로 짐을 꾸려 기도원을 나오는데 기도원 입구에 있던 개집에서 큰 개가 저를 보고
“우엉 우엉 우엉 우러러럴럴 러렁 러렁...” 하고 짓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내가 개 방언을 했네. 내참!

 

24.영력을 키우는 방법

 

영적인 능력(靈力)이 있으면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습니다. 아무 가진 것 없어도 세상에 두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위엄이 생깁니다.
하지만 영력이 없으면 세상이 두렵고 무섭고 위축되어서 비실비실 사람구실 못하게 되지요. 특히 목회자에게 靈力이 없으면 최악의 상황이 됩니다. 첫째는 사모에게 무시당하고, 교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문밖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합니다. 그러면 얼른 “내가 ‘영력’이 없어서 그러는 거야” 하고 깨달으면 좋겠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야”하고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에서는 돈이 우상입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 따라가면 가룟 유다처럼 돈도 잃고 몸도 잃고 패가망신합니다.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돈을 좋아해 돈과 함께 같이 돌아버리면 진짜 돌아이(또라이)가 됩니다. 돈은 돌리는 것이지 같이 따라 도는 것이 아닙니다.
영력(靈力)은 굶기만(금식) 한다고 커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 누르고 있는 것을 제거해야 되지요. 그것은 ‘돈’입니다. 돌려야 될 돈에 눌려 있거나 잡혀 있으니 영력이 자라지 못하지요.
돈이 생기면 얼른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세요. 돈 없이 어떻게 사냐구요? 줄 때 내 속에 더 큰 에너지와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삽니다. 주는 것이 채우는 것입니다.
조금만 있어도 얼른 주는 것이 돈에게 눌리지 않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금광에서 금 캐내듯 성경을 판다고 해서 영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전8:2) 자꾸 내 것을 주고 퍼내어야 내 안에 영력이 차오릅니다.(롬12:1) ‘돈’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력이 없어서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살기 힘든 것이 아니라 ‘영력’이 없어서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25.어떤 사람

 

어떤 사람이 너무너무 미워서 쫙 찢어 죽이고 싶다며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지면서 화가 나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하나 샀는데 불량품이라며 바꾸러 왔습니다. “이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 내 얼굴이 미워도 너무 밉게 보여. 바꿔 줘”... 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개그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미워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거울이 불량품이 아니고, 진짜 내가 미워도 너무 미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람을 붙여 주심으로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게 하셨습니다.(마5:5)
어떤 사람이 나에게 들어와 걸림이 되면 얼른 내 영을 진단해 보세요. 그 사람은 거울이고 청진기이고 엑스레이입니다. 내 영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분의 걸림이 다른 사람을 통해 투영이 되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의 꼴보기 싫은 말이나 행동이나 습관이 사실은 나의 것입니다. 내가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워 보이면 얼른 축복기도를 해주고, 어떤 사람이 싫다면 선물이라도 주어서 좋아지도록 하고, 어떤 사람이 말을 많이 해서 시끄럽다면 내 말수를 줄이고, 어떤 사람의 실수가 거슬린다면 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애쓰고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면 마귀가 역사하여 그 사람이 우상이 되고 결국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내 영을 비추어주고 진단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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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교회의 주인은

 

목욕탕 하던 건물에 어느 날 건강기구를 파는 사람들이 들어와 그곳은 한동안 동네 노인들의 놀이터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노인들도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장사꾼들이 떠나버린 것이지요.
교회도 결점 투성이의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언제 뿔뿔이 흩어져 버릴지 모를 곳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아무 이익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 같으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교회는 끊임없이 헌신을 요구하고 헌금을 요구하는데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서는 기가막힌 프로그램이나, 장기 비전이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이나,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목사나, 능력이 많은 주의 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이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 교인들은 어리석은 목사를 예수님처럼 감싸 안을 것이며, 목사는 괴팍스런 교인들까지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끝까지 품어 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교회에 주차할 곳이 없으니까, 목사의 설교가 맘에 안 드니까, 교인들의 수준이 낮아서, 교회 시설이 낡아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등등 무수히 많은 이유를 대면서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만약, 교회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목사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골치 아픈 성도들은 다 내쫓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만 남겨서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어 놓고 그걸 목회라고 우길 것입니다.

 

모두 288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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