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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책

예수 잘 믿는 비결 (최용우) -햇볕14

by 최용우 2021. 6. 4.

 

책 구입 클릭! <예수 잘 믿는 비결>326쪽 12100원 https://c11.kr/cyw04

 

<책소개>

 

한번은 신천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우리는 종말에 추수군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추수를 하려면 들판으로 가야지 어째서 교회로 오셨습니까? 남이 애써 추수해 놓은 것을 가로채는 것은 ‘도둑놈’ 아닌가요? 뭘 훔치러 왔습니까?” 그랬더니 그냥 갔습니다.
온갖 가짜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지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처럼 보이는 혼탁한 세상입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길 잃지 않고, 가짜에 속지 않으며, 진짜 예수를 따라가야 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유난히 ‘순수 복음’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 대한 통찰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무릎으로 쓴 글을 ‘예수 잘 믿는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에 내 놓습니다.

 

<추천사>
최용우 전도사님은 뛰어난 관찰자이다.
그는 항상 좋은 글을 쓰기위해 일상에서 글감을 열심히 찾는다. 5년 이상 한 교회에서 가까이 지내다보니 그 열심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리고 나와 우리교회가 그의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번에 이러한 글들이 ‘예수 잘 믿는 비결'이라는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다. 최전도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간 중요한 어떤 점이 드러난다. 그 어떤 점은 본질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의 자물쇠를 여는 뜻밖의 열쇠이기도 하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분명 가볍지 않지만 그의 글들은 복잡하거나 어렵지가 않다. 재미가 있다. 배를 잡고 웃기도 한다. 복잡함을 단순화시키는 그 만의 비결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선택한 독자 분들에게 최전도사님의 글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단순화시키는 하나의 과정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중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김대철 목사 (도토리교회 담임)

 

책 구입 클릭! <예수 잘 믿는 비결>326쪽 12100원 https://c11.kr/cyw04

 

목차
1부 -예수 잘 믿는 비결

2부-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사람

3부 -하나님을 사랑하라

4부 -예수님의 얼굴

5부 -예수 믿는 기쁨

6부 -예수님만 믿습니다

 

<내용 맛보기>

 

1.예수 잘 믿는 비결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자녀를 믿음으로 잘 양육하고, 공허한 쾌락은 내던져 버리고, 단순하고 고요해지며 겸손케 되기를 끊임없이 구하십시오. 당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어지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를 잘 믿는 비결입니다.’ 라고 -페늘 롱(예수님 마음찾기/순전한 나드)은 말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숨기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가 ‘너 자신을 알라’ 고 한 그 ‘너 자신’을 정말로 잘 아는 사람이지요. 예수님 안에서 보면 나 자신은 너무 형편없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잘난 것 없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 부족한 나를 예수님이 덮어 주셔서 세상에 둘도 없는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셨구나! 아하~ 하고 깨닫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처한 형편과는 아무 상관없이 언제나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활기찬 +(플러스)에너지를 내며 삽니다.
반대로,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가 나은 것이 있으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사람들, 남들보다 단 한 가지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잘못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아는 것은 되게 쉽습니다.
그 사람의 직분이나, 신분이나, 나이나, 직위고하를 떠나 그 입에서 불평, 불만, 실망, 자기자랑, 자기 자부심, 자기비하 같은 -(마이너스)에너지가 나오면 예수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입니다.

 

2.기독교 신앙의 핵심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기론 그분은 모태신앙에, 어릴 적부터 교회 안에서 온갖 봉사를 다 하고 살며, 여기저기 알려진 집회는 거의 다 다녔습니다. 크로스웨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같은 세미나도 수료하였습니다. 매일 월간지 ‘생명의 삶’을 가지고 큐티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 그런 분이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달라고 하다니요. 제가 오히려 그분에게 물어야할 질문 같습니다만.
아마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저를 놀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안 하면 무시한다고 할지도 몰라 간단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면의 신앙’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신앙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내 안에 영혼의 기능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나야 생명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결심과 다짐만 가지고는 절대로 사람이 안 변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면 자연스럽게 아름답고 풍성한 삶의 열매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한다고 하셨는데, 알곡은 ‘영혼이 깨어나’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고, 쭉정이는 겉으로 보여지는 신앙의 스펙(specification)은 대단히 화려한데, 영혼의 기능은 전혀 개발이 안되어 있어 열매는 맺지 못하는 것을 ‘쭉정이’라고 합니다.”
알아듣는 듯도 하고 전혀 이해를 못하는 듯도 하고... 암튼 해석하기가 무척 난해한 표정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기독교인들도 자살을 하는 시대’입니다. 내면이 너무 허망하기 때문이에요. 외적인 욕망이나 욕심을 채우기에 너무 바빠 ‘내면 관리’를 제대로 안 한 탓입니다.

 

3.예수님을 만나야

 

예수님을 잘 믿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막5:30)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설교 듣고, 성경 읽고, 전도 하고, 성경공부 하고, 코이노니아 교제를 나누는 것 다 좋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반드시 꼭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신앙생활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만남 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그저 급할 때만 주님을 부르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전도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세미나에 참석하고 부흥회에 참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고 훈련하는 것과 만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저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알고 있는 교리나 신앙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실제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신비한 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십니다. 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혈우병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간절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필사적로 주님께 접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를 만큼 조용하고 신중한 것이었습니다.


4.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고 실제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2천년  전에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지금 무슨 수로 어디 가서 어떻게 만난단 말입니까?
도처에 자기가 재림한 예수라고 뻥치는 사람들이 한국에만 4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을 만나러 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꾸 밖에서 인간의 감각과 이성과 감촉과 지식으로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가짜들이 나타나 자기가 예수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은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찾아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희망을 잃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몸에 붙은 겉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5-18) 저희 눈(마음속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겉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속눈)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고 (눅24:31-32)
몸에 붙은 겉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속눈으로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우리를 도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란 약속을 하셨고 실제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오늘도 나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5.만난 사람과 못 만난 사람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마치 남녀가 때가 되면 이성호르몬이 분비되어 결혼 상대자를 찾듯 그렇게 예수님을 찾도록 도와주십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 예수님을 몸 밖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몸 안에서 만난다는(만나는 장소가 내면이라는)사실이 이해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거야 쉽지요. 내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만나고서 만났다고 하는지, 아니면 만나지 않고서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지요.
아무래도 제 안에는 ‘종교심’이라는 DNA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요.
“하나님, 제 성격 개 같은 거 아시지요? 제게 얼굴 한번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알고 저는 부처님을 따르겠습니다. 부처님은 절에 가면 얼마든지 그 얼굴을 볼 수 있잖아요. 진짜 마지막 경고입니다. 저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네????? ”
제가 이렇게 막 대들면서 하나님께 불경죄를 저지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제게 보여 주셨을까요“ 안 보여주셨을까요? ㅎㅎ 하나님 코빼기도 못 보았습니다. 하마터면 중이 될 뻔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대신에 제 자신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제 앞에 계셨는데, 그동안 제가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더라구요. 그 안경을 벗으니 그냥 다 보여~! 안경 벗는데 10년 걸렸고 지금도 벗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내면 의식(생각, 관념, 정신, 얼 등등....)의 뒤쪽 ‘무의식’의 영역에 계십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표현으로 ‘분심(생각의

가루)’라고 합니다. ‘정념(욕심)’이라고도 하지요. 이게 없어져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중세 무명의 수도자는 그것을 ‘무지의 구름’이라 표현하면서 구름 위쪽에 하나님이 태양처럼 존재한다고 했고, 기독교 수도원인 ‘가르멜수도원’ 원목이었던 ‘십자가의 요한’은 ‘어두운 밤’이라고 했습니다.
밤을 지나야 해가 뜨는 아침이 오듯 나의 내면의식인 ‘분심’을 깨끗이 정화시켜야 하나님이 찬란한 태양처럼 나를 조명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들어보면 자기의 생각, 관념, 정신, 얼 등등.... 자기 안경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 이야기를 하는지, 진짜 구름을 뚫고 올라가, 어두운 밤을 지나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서 그분 이야기를 하는지 그냥 알 수 있다는 것이죠.

 

6.내 영혼이 주를 찬양


예수님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의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입니다. 이 둘이 분리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하며, 육체 안에 영과 혼이 들어있습니다. 영혼이 몸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통로는 코입니다. 그래서 코를 막아버리면 죽습니다. 입으로 숨을 쉬면 된다고요? 입은 숨이 드나드는 비상통로입니다. 입으로 잠깐 동안 숨을 쉴 수는 있어도 입으로만 숨을 쉬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영’ 과 ‘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심(兩心)이라고 하지요. 내 안에 ‘영’ 과 ‘혼’ 이렇게 두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혼’은 나의 의지, 의식, 생각, 정신, 얼 등등으로 불리는 내 안에 있는 나의 나됨입니다. ‘영’은 내가 아닌 내 안의 또 다른 나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혼’이 강하면 영의 기능은 약해지고, ‘영’이 강해지면 혼의 기능은 약해집니다.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사람은 혼이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주로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혼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가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영’을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혼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영’으로 느껴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강한 혼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거나, 소리를 내는 기도를 하거나, 영으로 부르는 찬송을 듣거나, 침묵을 해야 합니다. 중세시대 수도사들은 ‘혼’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을 불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나 아무렇게나 만날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거룩의 속

성을 가진 ‘영혼’이 깨어나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내 안에 있는 영을 불러내세요.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영혼을 불러내는 찬양을 계속 부르면서 집중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그 무엇인가가 내 안에 충만해지는(가득차는)느낌이 옵니다.
오! 드디어 내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기 적전이군요! 

 

7.육체의 준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잠깐 외출을 하려해도 얼굴을 화장으로 발라 예쁘게 변장하고, 방안 가득 옷을 늘어놓고 입을 옷이 없네 있네, 결혼을 잘했네 잘못했네 어쩌고 저쩌고 한바탕 요란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육체의 준비 -먼저는 영혼을 담고 있는 껍데기인 육체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육체는 본성(본능)의 지배를 받고 그 다음 생각의 조종을 받습니다. 본성은 개, 돼지, 소 같은 동물에게 있는 본능입니다. 그러니까 본능대로 반응하며 사는 사람은 ‘개, 돼지 같은 수준의 삶’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들 중에 특별히 사람에게만 ‘자유의지(생각하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가 너무 강하면 하나님도 안 보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따먹고 온 인류의 죄의 시조가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려면 먼저 육체와 자유의지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에 큰 병이 들어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만나기도 하고 그럽니다.
몸을 약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 먹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 중에 가장 강력한 기도는 ‘금식기도’ 입니다. 딱 하루만 금식해도 몸은 힘이 없어 흐느적거려도 정신이 또릿또릿하고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소리를 내는 발성기도도 ‘자유의지’를 약화시킵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외치는 주여 삼창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가는귀 먹으셔서 그렇게 큰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유의지가 너무 팔딱거리기 때문에 그거 때려잡으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 지르는 소리를 내면 내 생각이 좀 잠잠해지지요. 그러니까 하라면 좀 하세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개미소리같이 입만 뻥긋거리지 말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좀 우렁우렁 소리를 질러 보세요. 자유의지가 확 꺾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하기, 30분씩 기도하기... 30분씩 한 시간씩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좋은 훈련입니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도 10분하면 별로 기도할 것 없습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이게 기도야? 다리만 저리고 기도한 것 같지도 않네. 그래도 그걸 참고 꾸준히 30분이나 한 시간씩 계속 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정입니다. 기도의 달인들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육체와 의지를 복종시켜 기도의 체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면 기도의 세계로 바로 올라가겠는데 그 조금을 더 못해서 아이고, 기도 힘들어 못해먹겠네... 평생 기도를 하다 말다 하다 말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8.마음의 준비

 

방 청소를 하다가 작은 단지 안에 유리구슬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작은딸 밝은이가 어렸을 때 그렇게 기를 쓰고 유리구슬을 모으더라구요. 그런데 중학생이 되어서 그 유리구슬을 보더니
“준이나 갖다 줘 버리세요”
“너 옛날에 이게 보물이라며 죽어도 안 주더니 웬일이냐?”
“아유... 그때는 뭘 몰랐으니까 그랬죠. 이까짓 유리가 뭐라고...”
천원에 열 개를 살 수 있는 유리구슬은 뭘 모르는 초등학생들이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진짜 보석구슬이라면? 우왁!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주지 않고 꽁꽁꽁 잘 숨겨 놓겠지요? 그리고 혼자만 슬쩍 살짝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보석구슬을 갖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원하는 사람만 찾을 수 있도록 살짝 숨겨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아무 때나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하는 분들을 주의하세요. 대부분 가치 없는 유리구슬을 가지고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지난 2000년 간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개신교(종교개혁 이후)인 들만 그 방법을 잘 모릅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두 번째 준비는 마음의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육체 안에 마음(혼)이 있고, 마음 안에 영(영혼)이 있고, 영혼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다스려진 후에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 안에는 온갖 생각들이 바글바글 와글와글 지글지글 시끌시끌 그래서 마음의 통로인 ‘입’ 입구를 꽉 막아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침묵’이지요.
수도원 입구에는 어디나 ‘침묵’이라는 글을 새긴 바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첫 단추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침묵하며 눈을 감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제 그때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는데,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이 확 일어납니다.

10000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이 엄청난 생각들을 조금씩 ‘정화’시켜나가다 보면 마음이 점점 맑아지고 희미하게 보이던 하나님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데도 도무지 보이지 않을 만큼 마음에 낀 먹구름과 같고 어둔 밤 같은 생각(분심, 정념)을 지우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9.하나님은 뇌 속에 계신가?

 

과학자들은 요소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없는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마음, 정신, 영혼 같은 것들도 실증할 수 없기에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뇌세포들 간에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작용의 지향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마음’은 뇌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뇌 신경세포의 구조상의 문제에 불과할까요? 과학자들은 뇌는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생각을 좋게 바꾸면 뇌세포의 연결망 구조도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뇌가 지식과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마음’이 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영과 혼’이 담긴 그릇이며 뇌와는 다른 구조이고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있습니다. 마치 텔레비전이 전파를 잡아서 전기적 변환을 통하여 화면에 영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뇌는 그저 마음에 있는 것을 의식이 인식하도록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뇌의 구조를 바꾼다고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깨어나야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어야 뇌의 구조가 바뀌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선(禪), 단, 기, 요가, 명상, 뉴에지지, ‘도를 아십니까?’ 하고 길거리에서 묻는 이런 류의 집단은 모두 ‘뇌’의 구조를 음악이나 명상 수련을 통하여 강제로 조작하는 단체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뉴 에이지를 가까이 하면 안 되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뇌’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 놓은 허상(虛想) 뒤에 있는 마음속의 영혼입니다. 마음의 정화(淨化)는 바로 이 뇌의 허상을 떨쳐버리는 작업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10:10)라고 했지 ‘뇌의 기능을 바꾸어 의에 이르고’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치원,

학교, 학원 뺑뺑 돌면서 ‘뇌에 지식을 저장하는’ 훈련만 죽어라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뇌가 뱅뱅 꼬였는지(뉴런이 많이 꼬인 사람이 머리가 좋다면서요)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신앙도 ‘머리 신앙’입니다. 실체이신 하나님은 전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가득 들어있는 대갈통. 머리신앙.
아.. 머리 아퍼...

 

10.어떻게 변하는가

 

드디어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사방은 칠흑같은 어두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 중앙에 강한 조명 하나가 쨍! 하고 비추면서 주인공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온통 깜깜한 어둠 가운데 관객은 주인공의 얼굴과 몸짓만 선명하고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연극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정화시키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성격이 단순하고 온유한 사람은 매우 쉽게 마음을 정화하는데, 머리가 좋고 이성적인 사람은 좀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마음속에서 100만가지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질 즈음 어느 한 순간 ‘팍!’ 하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들어옵니다.(저의 경험) 이것이 ‘하나님의 조명’입니다. 하나님의 조명의 순간은 사람마다 방법이 다 다릅니다. 저처럼 한 순간에 ‘팍’ 하고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비추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빛이신 하나님이 나를 조명하시는 순간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그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그렇게 평생 벽을 보고 앉아서 찾는 바로 그것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조명만으로도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삶에 어떤 변화를 겪는가요? 하나님의 조명이 비추기 전까지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사람의 결심은 대부분 ‘작심삼일’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조명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불을 환하게 켜고 보니까 내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러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부끄럽고 창피하여 얼른 옷을 찾지 않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조명 이후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변한다고 봐야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소나무 뿌리를 뽑으면서 강력하게 기도하여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유명한 부흥강사나 예언사역을 하는 사역자들도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라서 다른 사람의 영적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명을 받으면 다른 사람의 모습도 그냥 보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조명을 받지 않고 머리로만 ‘지식 목회’를 하면 평생 교인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하고 “이 세상에서 목회가 가장 힘들고 어려워요 잉잉”하면서 한숨이나 쉽니다. 세상에 목회만큼 재미있고 쉬운 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11.몇 번이나 만나야 할까

 

우리가 사람을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데, 예수님의 만남은 한번으로 족한가요 아니면 계속적으로 만나야 하나요? 만남에도 질이 있습니다. 13333만남의 법칙에 의하면 나를 중심으로 점점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만남의 질이 약해지지요.
평생 잠자리를 같이 할 배우자는 1명,
매일 밥을 함께 먹을 가족은 3명,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는 30명,
만나면 아는 척 하며 인사를 나눌 정도의 주변 사람은 300명,
이름을 들으면 누구인지 알만 한 사람 3000명
그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들어있다는 법칙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이번에는 점점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영적 만남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횟수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깊이 만나는가 입니다.
개신교 수도원인 갈멜수도원의 십자가의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영성 10단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이지요

1층-자신의 병과 영혼의 무지를 발견하는 첫 단계로서 마음의 정화 후 하나님의 조명이 있는 단계이며 영성의 초보단계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는 강력한 자각과 자성의 단계입니다.
2층-님을 사모하여 찾음과 기쁨과 위로를 ‘가끔’ 얻는 연예 단계
3층-계명을 지키는 낙(樂)과 자신의 모자람, 흠 투성이 발견하고 가슴아파하는 결혼 준비 단계
4층-밖에는 그 어디에도 위로가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찾아내는 단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되 는 약혼 단계. (지금 교회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99%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영광이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영광이다.)
5층-영의 합일 단계. 하나님 만날 궁리만 한다. 님과 떨어져서는 이

제 죽을 수밖에 없을 뿐임을 고백하는 결혼 단계.
6층-영혼의 날개 비상과 희망의 날개를 펼치는 단계
7층-대담(결단, 용맹, 자유) 분명하고 물러섬이 없는 단계
8층-영의 집착으로 합일 소원의 부분을 성취하는 단계
9층-영혼이 맛깔스럽게 불태워져 하나님 안에서 정열이 하나되고 규모를 갖추게 되는 단계.
10층-하나님 닮음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밝은 직관 소유하는 단계 -피조된 神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드러나는 단계.

지금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1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저요? 저도 2-3단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일년에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 가끔 ‘선물’처럼 3단계를 맛보기도 합니다.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가 안 됩니다. 7층 정도 올라가면 ‘순교자’가 되고 10층을 다 올라간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합니다. 성인은 한 세기에 1명이 나올까말까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명의 성인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내면(內面)의 종교인데, 지금처럼 한국 기독교가 내면을 외면하고 자꾸 밖으로만 확장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볍고 천박한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다. 외면(外面)을 좋아하면 사람들에게 외면 받습니다.


12.그냥 함께 있는 것

 

사람은 만나서 보통 이야기를 하는데, 실체가 없는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대화를 하나요. 대화란 혼자 독백이 아니고 상대방과 언어를 통해서 주고받는 것인데 가능한가요?
사람과 사람은 만나서 언어로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랍니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은 서로의 호흡(숨)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껄끄러운 상대라면 빨리 헤어지고 싶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호흡의 교환입니다.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 100미터 전방에서 담배를 피어도 그 연기 냄새를 맡습니다.(제가 그래요. 이건 뭐, 개코도 아니고... ) 공기를 통해서 날아온 연기를 코로 흡입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내뱉은 숨을 서로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뽀뽀를 하고 싶어지지요? 왜 그럴까요? 정말 왜 그럴까요? 왜? 왜? 왜?... 그건 더욱 강렬하게 그 사람을 호흡하고 싶어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예수님과 어떻게 대화를 하나요? 성경은 ‘감동, 감화, 교통, 충만’ 등등 여러 가지 단어를 막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호홉’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는 나의 의지가 약해지고 내 영혼이 깨어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합니다. 그 인지의 방법이 ‘감동, 감화, 교통, 충만’의 형태로 뇌 속에 인식됩니다. 그래서 “예순님!” 하고 부르면 내 안에서 “오~냐?” 하는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대답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의 대화는 물질과 물질이 만나서 하는 물리적 대화가 아니고,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통화가 가능한 ‘핸드폰’처럼 사이버(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감’이라는 것이지요. 그 공감의 파장(핸드폰의 전파와 같은)이 호흡입니다. 기도는 호흡이다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실제로는 해보면 아주 쉽습니다.


13.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실 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만나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깊은 만남일수록 그 준비도 더욱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고통도 감수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는 척 해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열망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가볍고 천박한 믿음일 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마5:8)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마음속에 가득한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데, 이것을 ‘정화’라고 합니다.
유리 뒤에 수은(水銀)을 바르면 나 밖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됩니다. 생각은 마치 수은 같은 것이어서 유리를 통해 밖을 보지 못하도록 차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생각을 ‘정화’해야 합니다.
생각을 정화시키는 과정은 마치 구름 속을 나는 것 같고,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킨 사람에게는 구름 위에 있는 빛나는 태양 빛을 볼 것이며, 어둠이 지나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볼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라고 믿고 바라보는 그것은, 개인의 야망과 욕심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거울에 비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은 그것은 개인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신념이나 주술에 불과합니다.


14.왜 목사님은?

 

<질문>
왜 목사님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내려올까요. 너무 답답해요, 청중이(성도가)이 궁금할 것 같은 의문에 대하여 생각하고 찾아보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사례를 통하여 설교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은 사전, 자료, 연구논문을 읽고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려고 노력하는데, 목사님들은 너무 감정에 만 호소하고 어떻게 하든 주일에 교회에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답>예 맞습니다.
청중이(성도가)이 궁금할 것 같은 의문에 대하여 생각하고 찾아보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사례를 통하여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님들의 임무이지요. 대부분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설교를 크게 지성과 이성과 감정을 만지는 ‘지적 설교’와, 영혼을 만지는 ‘영적 설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설교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두 가지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기가 막히게 조절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 그만한 설교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 이유는 점차 세상이 과학과 이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발전함에 따라 점점 ‘지성적 설교’의 비중이 많아지면서 ‘영적 설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거의 90%가 ‘지성적 설교’이고 10%가 ‘영적 설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과학적 견해가 기독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성경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며 성경 한 권만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고 과학적이

고 합리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영적 거장들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신앙의 자양분들을 공급받지 않고 성경 한 권만으로 설교를 하려고 하니 거의 바닥이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번 설교가 박박 바닥 긁는 소리를 내는 것이고 할 말이 없으니 자기자랑만 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역사상 나타난 성인(聖人)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현재 하루에 3시간 이상 무릎 꿇고 기도하며 살고 있다면 무시해도 됩니다. 그 정도면 성인들이 경험했던 그 세계를 충분히 경험하고 ‘영적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평생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았던 성인(聖人)들의 영향아래 있는 종교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그들은 학자이다) 어쩔 수 없이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과학적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이 설교를 영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를 하게 되지요. 부실한 설교는 청중을 이해조차도 시키지 못하고 다들 꿈나라로 보내버립니다.
설교자가 하루에 3시간 이상 집중 기도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영적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뾰쪽한 방법은 없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쓸데없는 일에 너무 바빠 가장 중요한 하루 3시간 기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5.예수님을 만나는 방법

 

2천년전에 오셨던 예수님이 지금 오셨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요? 예수님이 오셨던 2천년전이나 요즘 세상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세계를 점령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마처럼 요즘은 미국이 ‘자본’으로 세계를 점령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치권에 빌붙어서 막강한 종교권력을 행사했던 대제사장들은 오늘날 기득권과 사이가 가까운 싸이즈 큰 교회들을 연상시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오직 예수’만을 외치며 도무지 대화와 타협을 모르는 급진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 목회자들과 비슷합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대한민국에 오셨다면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까요? 장로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실까요? 장자교단의 총회장님, 증경총회장님을 찾아가 큰절로 인사를 드리실까요? 아,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기총 대표를 만나러 가셔야 겠군요.ㅠㅠ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 예수님이 이미 한국에 와 계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낮은 자들을 찾아다니며 긍휼을 베풀고 계십니다.
잘나가는 사람, 나에게 이익이 되고 빽이 되어줄 사람 찾아가지 마시고 마음이 상하고 외롭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예수님을 뵙는 행운을 누리실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셨다면, 예수님은 눈을 찡긋 하시면서 조용히 하라고 ‘쉿!’ 하실 것입니다.

 

16.네 가지 비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악한 영’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멀쩡한 사람인데 몇 마디 나누어 보니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도무지 말이 안 통합니다. 목회자 가운데에도 많습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되는 사람,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환란이 그치지 않는 사람, 아무리 해도 앞날이 깜깜한 사람, 삶에 회의가 드는 사람, 뭘 해야 될지 몰라 무기력에 빠진 사람... 모두 악령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마귀의 저주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나 사모님들 가운데에도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1.창3:15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 무슨 일을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지 말고 그 일을 면밀히 검토해서 ‘악한 영’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단호하게 선포하시라.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박살내었다! 너는 지금 디졌다. 너는 지금 나를 방해할 수 없다! 
2.창세기4:1-20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 아벨이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피는 흑암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의 피를 사용하면 그동안 나를 괴롭히며 나를 빨아먹고 살았던 마귀의 저주는 끝납니다.
3.‘유월절’ 이라는 단어에 답이 있습니다. - ‘유월’은 ‘지나간다, 넘어간다, 비켜간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영, 죽음의 영, 가난의 영, 사망의 영이 ‘유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고 바르면 우리의 삶에 기생하던 더러운 마귀들은 조빠지게 도망치게 됩니다.
4.‘가나안’이라는 단어에 답이 있습니다. - 왜 자꾸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했을까요? 가나안에 언약(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메시아가 오기로 되어 있고, 오셨고, 다시 오실 곳입니다. ‘집’이나 ‘교회’가 ‘가나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곳에 우글거리는 70귀신은 다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17.예수님처럼 하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정말 열심히 목회를 하십니다. 교인들의 온갖 대소사를 다 기억하고 관여를 하시고, 이사를 하면 달려가 이삿짐까지 다 싸주고 짐 정리까지 다 해주십니다. 심지어 교인들이 그걸 이용하여 개인적인 일로 목사님을 부려먹는 일까지 있어서 제발 무조건 교인들을 도와주지 마시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헌신적이며 열심이신 목사님이시건만, 목사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하도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워 그 교인을 찾아가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한번 생각해 봐라! 그동안 목사님이 당신의 종도 아닌데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느냐? 부모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대신 야단을 친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99가지 도움을 받은 것 보다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그것을 가지고 섭섭하다며 뒤통수를 치더라구요. 목회자의 일이 교인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열심히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도와주어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도와야 할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 예수님은 그래도 도우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 구별하지 않고 다 도우셨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열심히 교인들을 도우려고 하지만, 만약 그 교인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할 감각이 없다면 도와주고도 배반을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교인의 심령 가운데서 역사하는 ‘악한 영’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적하여서 그 교인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 한 그 교인은 상습적으로(?) 목회자를 이용해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사람들을 돕되 먼저 그들을 묶여 있음에서 풀어주어 ‘자유’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돕되 예수님처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18.예수 믿고 행복한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행복합니다. 행복해도 보통 행복한 것이 아니라, 너~~~~무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바깥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의 정신을 따라가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보화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찮은 것이 좋아 보여 그것이 없다고 징징댑니다. 내 주머니에는 진짜 진주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천원에 10개짜리 유리구슬이 나에게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의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가난한 자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면 얻을 수 있는 신분이 되었으며, 이 땅에서 천국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사람은 신속하게 교만해지고 방자해지고 죄에 빠져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나그네란 단순하고 조촐할수록 좋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수 있지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이래도 행복 저래도 행복입니다.

 

19.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열려야 합니다.
1.耳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귀가 되어야 합니다. 말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악한 영이 손가락을 양쪽 귀에 집어넣고 꽉 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리지 않으니 이해가 안 되고 이해를 못하니 딴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2.目 -눈을 열고 잘 보아야 합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분을 뵙고야 말리라.’(욥19:27) 설교시간에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을 보면 악한 영이 달라붙어 눈꺼풀을 아래로 누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口 -입을 열고 잘 말해야 합니다.
입이 열리는 것은 배가 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입을 먹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입은 배에 있는 권세와 능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도구입니다. 입은 생각을 실체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입이 닫힌 사람들을 보면 악한 영이 주둥이를 꽉 잡고 말을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鼻 -코를 열고 잘 깨달아야 합니다.
코가 열리는 것은 가슴이 열리는 것입니다. 숨을 잘 쉬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코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간 산소는 심장을 거쳐 피를 타고 온 몸으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숨이 약한 사람은 불안하고 소극적이며 병에 잘 걸립니다. 통성기도와 힘찬 찬송으로 코를 확 여세요. 삶이 만사형통! 잘 풀릴 것입니다.

 

20.신앙의 3대 영(靈)양소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3대 영양소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질입니다.
탄수화물은 쌀, 곡류, 과일, 우유, 콩, 감자 등에서 섭취할 수 있으며 몸과 마음과 머리의 활동에 가솔린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영양소입니다. 탄수화물이 부족하면 몸과 뇌 활동이 느려지고 초조해지거나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단백질은 생선, 비계가 적은 고기, 달걀, 유제품, 콩 등에서 섭취할 수 있으며 몸 안에서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다음 호르몬이나 효소 등을 생성하여 몸을 만드는 중요 영양소입니다. 효소는 체내의 모든 기능에 없어서는 안되고, 호르몬은 각 기관이 잘 작동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건강하고 예쁜 몸매를 유지하려면 단백질 섭취가 충분해야 합니다.
지방질은 등푸른 생선, 호두, 오일, 아몬드 등에서 섭취할 수 있으며 뇌의 기능, 비타민 운반, 식사의 소화, 흡수, 지용성 비타민의 운반, 장기, 신경, 뼈 등을 지키거나 체온 등을 정상적으로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지방질이 부족하면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지요.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3대 영(靈)양소는 말씀, 기도, 찬양입니다.
말씀은 탄수화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 먹지 않으면 점점 영혼이 둔화되고 점점 세상에 집착하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찬양은 지방질 같은 것입니다. 입에서 찬양이 사라지면 더불어 감사와 기쁨도 사라지고 불평불만이 늘어나면서 삶이 삭막해지지요.
기도는 단백질 같은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오는 공급의 통로가 끊겨 매우 힘들고 곤고하게 되고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막 터지게 됩니다.

 

287.왜 오르느냐고 묻기 전에

 

해마다 신년산행(新年山行)을 합니다. 덕유산, 계룡산, 민주지산, 백암산, 소백산, 남덕유산... 올해는 경상북도, 충청북도, 전라북도가 만나는 삼도봉(三道奉)을 오르려고 합니다.
함께 할 동행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섬주섬 배낭을 꾸려 떠납니다. 겨울산은 날씨가 포근하면 눈부신 설경이나 빛나는 상고대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 수 있고, 어느 때는 뼛속까지 스미는 바람과 싸우며 힘겹게 산을 오를 때도 있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새하얀 나무 숲 사이로 어디선가 톰누스가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 나올 것 같은 나니아의 나라를 걸어보기 전에는 겨울산행의 묘미에 대해서 차라리 말을 마셔!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시는가?” 라는 질문에 산악인 조지 말로니는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산이 그 곳에 있으니, 내가 그 산을 오른다. 이것은 마치 연어가 먼  바다를 돌아 자기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인간은 우주와 자연의 일부분이니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뜻이지요.
각박한 생존경쟁의 틀에서 일탈하여 감성의 자유,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등산입니다. 등산은 우리의 고향인 자연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며, 그 속에는 꿈이 있고, 준비가 있고, 철학이 있고, 우정이 있고, 열정이 있고, 사색이 있고, 감동이 있고, 쾌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극복이 있고, 휴식이 있고, 회상이 있는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높은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고,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하늘의 기운을 받으면 좋잖아요.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묻기 전에 한번 산에 올라보시길!

 

*모두 287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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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시리즈

1.최용우 칼럼11<가슴을 쫙 펴라!>308 11600 https://c11.kr/cyw01

2.최용우 칼럼12<다시 벌떡 일어나라>336 12400 https://c11.kr/cyw02

3.최용우 칼럼13<정정당당 잘 살자>336 12400 https://c11.kr/cyw03

4.최용우 칼럼14<예수 잘 믿는 비결>326 12100 https://c11.kr/cyw04

5.최용우 칼럼15<가장 큰 선물>326 12100 https://c11.kr/cyw05

6.최용우 칼럼16<인생 최대의 행복>316 11800 https://c11.kr/cyw06

7.최용우 칼럼17<나도 할 말 있다 냐옹>318 11900 https://c11.kr/cyw07

8.최용우 칼럼18<하나님의 얼굴>326 12100 https://c11.kr/cyw08

9.최용우 칼럼19<예수님을 따르는 삶>328 12200 https://c11.kr/cyw10

10.최용우 칼럼20<예수 나의 형통>330 12200 https://c11.kr/cyw09

11.최용우 칼럼21<하나님과 동행하는 삶>320 14300 https://c11.kr/yw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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