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읽었던 스페인예수회신부의 서양윤리교양서 <칠극>을 번역해 펴낸 정민 교수. 사진 조현 기자
조선시대 빼어난 유학자들이 어떻게 나라에서 금기시했던 서학(천주학)에 마음이 기울었을까. 실학자와 서학의 만남을 탐구해온 정민(60)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런 질문의 끝에서 <칠극>(김영사 펴냄)이란 고서를 번역해냈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데 판토하(1571~1618·방적아)가 쓴 ‘마음 수양서’다.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한 탐구 정신으로 실학자와 문장가들의 흔적을 누비고 고서를 뒤져 70여권의 저서를 써낸 정 교수를 지난 11일 서울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스페인 선교사 데 판토하 쓴 ‘마음 수양서’유교 사단칠정에 빗댄 ‘7가지 죄’ 극복법마테오 리치 후계자…선교전략용 저술“중국인들 천주교 거부감에 완충장치로”
<칠극>은 조선으로 건너와 사도세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실학자들 사이에서 서학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유몽인의 <어유야담>에는 허균이 <칠극>을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왔다는 주장이 실려 있고, 사도세자가 읽은 책 목록에도 <칠극>이 포함돼 있다. 남인의 큰스승인 성호 이익은 ‘<칠극>에는 우리 유가에서 미처 펴지 못한 것이 있어, 예로 돌아가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서 ‘다만 천주와 귀신에 대한 주장을 섞은 것은 해괴하니, 모래와 자갈을 체질하고 고명한 논리만 가려 뽑는다면 바로 유가의 부류일 뿐이다’라고 평했다. 이를 두고 실학자들은 이익의 진의가 앞줄에 있다는 파와 뒷줄에 있다는 파로 갈려 싸웠다.“안정복은 이익의 말이 ‘서학을 경계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익의 직계 제자들이 천주학 쪽으로 돌아선 것을 보면 이익의 뜻은 당시 분위기상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앞줄에 방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이벽·이가환·정약용의 글에서 <칠극>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정 교수는 “당시 남인 실학자들이 <칠극> 등 서학 책을 읽은 것은, 노론의 전제가 70~80년간 이어지면서 변혁의 희망을 가질 수 없던 남인들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통로를 찾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봤다. ‘청나라 수도에 가면 서점이 30~40곳 늘어서 <앵무새 사육법> 같은 실용서까지 진열돼 있고, 서양문물이 들어와 발전해 가는데,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찌르자 오랑캐’만 노래하고, ‘사단칠정론’만을 두고 싸우고 있으니, 서양의 앞선 문물로 나라를 발전시켜보고 싶은 열망이 서학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다산에 이어 연암 박지원에 꽂혀 지난해 말 <연암독본>(1·2권)을 펴내기도 한 정 교수는 “연암의 <허생전> <양반전> 등을, 매점매석해 떼돈을 벌었다는 식으로만 읽는다면 한심한 수준”이라면서 “북벌을 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워 변화를 꾀해야 할 ‘북학’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시대적 허구와 위선을 통렬하게 깨부순 ‘우상파괴’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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