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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 읽기

수필(피천득)을 읽다 (범우001)

by 최용우 2021. 6. 9.

내가 가지고 있는 책

피천득의 <수필>을 읽다

피천득 선생님의 부음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옆구리가 누렇게 된 <수필>집을 꺼내 들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은 월간지 '샘터'를 통해서입니다. 아마 짧은 시 한편을 읽고 오랫동안 그 시를 외우고 다녔었는데...에구, 지금은 전혀 제목조차도 생각이 안나넹...
  피천득의 <수필> 하면...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별로 떠오르는 것은 없는데, 마음속에 많은 말을 간직한 사람처럼 넉넉해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피천득 수필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저도 수필가가 되고 싶어서 피천득 '수필'을 흉내내어 글을 써보곤 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쭈욱 연습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워째 지금은 낙서 비슷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피천득의 <수필> 책 속에 들어 있는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피천득 수필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버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靑春)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情熱)이나 심오(深奧)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頹落)하여 추(醜)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懶怠)하지 아니하고, 속박(束縛)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막스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저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도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스러나 수필가 햄은 언제나 차알스 램(C. Lamb)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일까지도 숫제 초조(焦燥)와 번잡(煩雜)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전문 전재-혹시 저작권에 걸리는 게 아닐까? 불안 불안... )

피천득의 <수필>은 범우문고 1번으로 나온 책인데, 서점에 보니 새로운 조판으로 책이 다시 나왔더군요. 사실은 <수필> 가운데 한편인 '인연'이 더 많이 알려진 글인데, 그것까지 치면 정말 저작권 따질 것 같아 한편만 쳐 올립니다.

원래 피천득<수필>은 범우에세이선17 번으로 나왔는데 범우문고가 생기면서 '범우문고 첫번째 책'이 되었다.
맨 처음 나온 표지
두번째 나온 표지(소장)
세번째 나온 표지
네번째 나온 표지(2021현재 판매중인 표지)
수필발간 33주년 기념판 표지


선생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지난주 5월 25일(2007년) 소천하셨습니다  ⓒ최용우

피천득(나무위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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