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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 읽기

느티의 일월 -모윤숙 [범우문고읽기034]

by 최용우 2022. 12. 21.

[범우문고읽기034] 느티의 일월 -모윤숙

 

<독서일기>

모윤숙 하면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것만 생각난다. -최용우

 

<책소개>

한국 문학사에서 여류 문학의 선구적 공적인 남긴 그녀의 수필은 '나'보다는 '우리'라는 객관적 입장, 사회적 입장에서 쓰인 테마가 우선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여성 문화의 발굴과 창조라는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꼽을 수 있다.

 

<저자소개>

한국의 언론인, 기자, 수필가, 정치인(국회의원), 시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목차>

느티의 일월

고독의 상태

4월의 본능

착각

생각하는 생활

남성, 그 허구의 초상화

황진이의 인생, 애정의 배후

나의 사우록

숲의 비애

진달래

반향

다랫골

가을

부전 고원

영이에게

 

느티의 일월日月 

 

갈색 잎새들이 조용히 깔렸다. -돌아 서울이 멀 리서 웅웅거린다. 혼선과 혼선이 서로 엇갈려 어떤 음정도 정확하지 않은 도시의 소리이다. 손을 마주 비볐다. 우右와 좌左가 기진맥진해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치마허리에 왼손을 넣어 온기를 찾는다. 몸은 무겁도록 벅찬 고목 허리에 기대어 서 있다. 비 먹은 눈서리에 6백년이란 나이를 안고 서 있는 느티, 여기 왕십리 벌에 자리잡은 이 능터는 긴 세월 배추만 심어 살던 땅이었다. 오색의 낡은 헝겊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성황당 나무, 전기도 없는 이 집에서 처음 2년을 사는 동안엔 밤이면 머리가 오싹하도록 겁도 나고 무서워서 이 나무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러나 전기도 들어오고 수도도 들어오면서부터 마을이 조금씩 개명 開明을 해가더니 밥을 던져 빌고 헝검을 매달아 절을 하던 아낙네들이 하나 둘 줄어들기시작했다. 그러나 늙은 느티나무의 영양은 말이 아니었다. 벼락에 부서진 중간 허리에 비만 오면 물이 흘러 들어가 느티는 여위기 시작했다. 비록 울밖에 서 있는 나무였지만 측은한 마음 참을 수 없어 마을 노인들과 의논을 했다. 처음에는 잘 통하지 않았으나 작년에야 겨우 타협이 되어 내 뜰의 50평 땅과 바꾸게 되었다. 느티의 둘레를 정돈하여 내 뜰 안에 넣고 헐벗겼던 뿌리를 감싸 주었다. 

어느 날 마을 노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60년이나 된 이 나무에는 이 능터에 묻었던 장희빈 다음 후궁이 또 묻힌 곳이라면서 창덕궁에서 일년에 한두번 청사초롱을 밝혀 들고 제사 행렬이 휘황했었 다고도 했다. 또 이조 말엽, 어느 임금이었는지는 몰라도 말을 몰아 이 벌에 나오면 이 느티에 말고삐를 잡아매고 물도 먹이고 그늘에서 쉬기도 했다는 것이다. 역사 풀이야 어찌되었든 개인의 나무 아닌 마을의 나무라고 마구 푸대접했던 일은 너무 무심한 처사인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어느 여름날을 잡아 이 마을 노인네들을 청해서 느티 그늘에 멍석을 깔고 막걸리와 빈대떡, 돼지고기 몇 점씩을 곁들여 대접을 했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이 집에 사는 동안은 이 느티 그늘에 정을 붙여 바둑도 두고 인생사를 허허 담소로 주고받던 이들을 가끔은 막걸리로나마 목을 축이도록 하리라 마음먹 었다. 

벌써 12월이라 가지만이 팔을 벌린 채 뻗어 있어도 하늘이 새어 내려오는 밤이면 가슴이 후련해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느티의 몸에서 뻗어 간 좌우상하의 가지가지에는 그대로 별의 숙소가 있고 바람과 노을의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오후 4시, 따스한 12월 오후다. 여독旅毒에서 아직 풀리지는 못했으나 친구들이 곁에 있었으면 싶다. 친구라야 C나 D 나 L같은 이들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조용한 자세들이다.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전화를 했으나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요즘은 그저 혼자 독서나 하고 해빙解氷하면 한번들 만납시다" 한다. 이 허한 대답에서 나는 그 대답보다 더 큰 허무를 느끼며 혼자 앉았다. 

차가운 왕십리 별들이 검은 가지 사이로 빛을 뿌린다. 밤은 길고 또 멀다. 느티에 초저녁이 지나면 늦달이 찾아오리라. 노엽다. 문득 나 자신에 노엽고, 정과 사랑에 노엽고, 고독 그 자신에게도 노엽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맵싸한 노여움이 가득 가슴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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