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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독서일기

[412권째] 세상에 무릎꿇지 말라(토저시리이즈15)

by 최용우 2022. 8. 24.

세상에 무릎꿇지 말라(토저시리이즈15)

 

1.하나님과 화목

원수였던 사람들이 서로 사랑 가운데 모이는 것을 화목(和睦)이라고 합니다. 죄를 원수로 여기신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과 화목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2.새로운 피조물

이 세상에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왜 인간들은 그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를 저지를까요? ‘흑암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5:17) 헌 것을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새것으로 새로 태어나(거듭나) ‘하나님의 권세’ 이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화평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은 마음의 화평,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없다고 하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사람들이 약물까지 복용하면서 얻으려고 하는 그 화평(평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화평(롬5:1)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화평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한 것’을 말합니다. 

 

4.최고의 권세

선지자, 사도, 왕, 교황, 황제, 대통령 같은 사람들도 일시적이고 상대적이고 덧없는 권세가 있지만, 하나님의 권세는 이들 땅의 권세와는 차원이 다른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는 생사(生死)를 결정짓는 주권적 권세가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를 기록된 말씀(성경)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5.말씀 안의 생사(生死)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겸손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먹이고 보호하며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불신하며 무시하거나 저항할 때,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말씀은 그것을 저항하는 자들은 죽이고, 그것을 믿는 자들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6.초대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그대로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7.교리에 대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믿었던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인 양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 사이비들의 ‘성경 짝맞추기’ 같은 것에 속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 교리는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확정한 교부(敎父)들이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그 범주를 넘어서 다른 복음에 기웃거리면 안 됩니다.

 

8.도덕성에 대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 만큼의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지금처럼 신자나 불신자나 차이를 느끼지 못한 도덕성이라면 그것은 초대교회를 계승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초대교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온전한 교리는 도덕적 삶의 변화까지 포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9.하나님을 향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고 삼위 하나님이 삶과 신앙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말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개입 없이도 잘 운영되고 잘 돌아가는 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지 ‘사도신경’ 안에만 존재합니다.

 

10.성령님을 향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성령님의 모든 은사를 믿어야 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성령의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 사도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자의적으로 그 시점을 정합니까? 성령의 ‘은사 중지론자’들은 성령님을 단지 축도(祝禱)와 송영 찬송 8장에서만 만날 뿐입니다.

 

11.육신에 대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육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육신이란 우리의 몸 자체라기 보다 우리의 ‘본성’ 즉 ‘자아’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세상 적 가치와 기준으로 조직되고 운영됩니다. 즉, 세례를 받고도 자아가 죽지 않은 좀비들이 설치고 다닙니다. 

 

12.세상을 향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보다 세상 유행을 더 닮아가려고 열정을 더 투자합니다. 교회는 이미 세상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13.예배에 대한 태도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요4:24)해야 합니다. 예배는 내면적인 것이며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전자악기나 드럼이나 프로젝터 마이크 같은 소품 없이 성경 한권 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예배는 점점 화려한 쇼(show)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14.거듭난 사람

거듭난 사람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재물을 바치고 고통을 감수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바쳐서라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거듭닌 사람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15.재물의 청지기

거듭난 사람이 되면 재물(물질, 돈)에 대한 태도가 ‘주인’에서 ‘청지기’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 저는 재물의 소유주가 아니라 주님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주님은 제가 가족과 사업장을 돌볼 수 있도록 충분한 재물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모두 함께 나누어 쓰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게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16.진리는 알맹이

진리는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말’이라는 껍데기로 둘러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하여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말 안에 집어넣는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말을 가지는 것이 알맹이를 가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말이 번지르르르 하다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 진리라는 알맹이가 더 많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17.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그 나라의 본질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말씀을 통해 역동적으로 활동하여 끊임없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복음입니다.

 

18.육신적 그리스도인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거듭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적이고 영적으로 불완전하며 영적 성장이 멈추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능력과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는 자들입니다. 

 

19.신령한 그리스도인

어떻게 하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비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을 정도이니 우리 같은 사람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령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훈련하고 성숙하게 해 달라고 자비를 구하면서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20.탄식하며 우는 사람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예배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그런 예배를 드리도록 설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위해 울 수는 있습니다. 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탄식이라도 할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한챕트를 200자 원고지 한장 길이로 요약하거나, 제 말로 바꾸어서 원고지 한장 길이로 쓴 것입니다.-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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