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범우문고 읽기

이브의 천형- 김남조 [범우문고읽기025]

by 최용우 2022. 11. 9.

[범우문고읽기025] 이브의 천형- 김남조

 

<책소개>

김남조 시인의 수필집.

하지만 전통적인 산문으로서의 수필이 아닌, 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이 되기도 하는 포에틱 에세이의 특징을 지닌다.

수월하게 읽히기보다는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여러 번 되풀이 생각해야 할 만큼 응축되어 있다.

이 책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겪지 않을 수 없는 헬레니스틱한 고뇌를 사랑으로, 기도의 언어로 나타낸다.

이 두 가지가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 합쳐지며 내면의 드라마를 이룬다.

 

<자자소개> 김남조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하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1955~1993),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예술원회원이고, 숙명여대 명예교수이다.

지은 책으로는 <목숨>, <나무와 바람> 등 다수가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여럿이서 혼자서>, <사랑 후에 남은 사랑>등 다수가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삼일문화상,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목차>

김남조론 - 7

이브의 천형 - 15

불탈 때만이 - 23

그 이름에게 - 27

남성, 그 삶과 죽읨 선린 - 31

심연을 위해 - 43

사랑의 정설 - 46

사랑의 은밀 - 49

오늘 생각하는 사랑 - 52

밤의 이야기 - 60

음악과 나와 - 65

정직과 정결에서 - 68

문을 여는 이들 - 76

여심무량 - 79

사람의 추위를 신의 제상에 - 88

백조 이야기 - 97

밤과 새벽 - 102

칼에 대하여 - 105

산과 바다의 기도 - 108

상처와 치유 - 118

나의 어머니 - 128

하롯불 요정에게 - 131

진정한 것 - 134

가슴은 알맞게 식어서 - 138

오늘 밤 이 편지를 - 148

시를 쓸 때 - 155

시와 시인이 하는 이들 - 159

 

<이브의 천형>

"그 포옹은 예배이며 범죄였다." 

이 한마디 말엔 사람의 통곡이 들어 있다. 연착과 참회와 욕망의 음성이 가락도 애잔하게 풀려 나온다.

정신이 알몸으로 벗겨져 한여름 뙤약볕의 불바위 위 좌선한다. 혹한 오밤중에 눈썰매를 타고 유령처럼 흔들거리며 유랑한다. 

구약성서의 원죄의 그 여자.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 은 이브에게 신은 제일로 아파할 천형天刑을 내리셨다. 

"죽도록, 또 죽은 다음에도 못내 사나이를 그리워하 도록." 

신의 분노가 이 벌칙을 작정하신 후 얼마만큼이나 자위를 받으셨는진 사람이 모른다. 

여자는 사나이에게 살과 마음을 다 준다. 죽어지는 한에도 오직 그러고만 싶어서 그렇게 한다. 사나이의 아이를 몸 속에 잉태한다. 산욕에서 소리 지르고 울부짖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다. 

애를 낳는다. 소모된 여자는 기진하여 눈을 감는다. 눈물이 뒤를 이어 흐른다. 

이날, 이 시각에서조차 이미 또 사나이를 원하고 있 다. 저들이 데려가는 온갖 허무의 지적地籍에도 불구 하고 저들을 옆에 두고 싶다. 불같이 일어 오는 목마 름, 안기고 싶다. 핏기 없는 손을 잡아 주면, 땀이 젖 은 머리카락을 잠시 쓸어 주면, 분류하는 열애를 못 참아 다시 목이 멘다. 

다음 애를 또 낳는다. 송두리째 내어주고 어떤 곤욕 도 너그러이 삼킨다. 승리에 넘치는, 권능 있는 시혜 자처럼 풍성히 베풀고 필요한 질량의 수요를 이내 매워 놓는다. 

긍지를 돌보지 않는 굴종, 버려진 터수에도 기다리 는 바보스러움, 치사하리만큼의 집착과 오욕의 흙탕 물 속, 헤아릴 수 없는 헌신의 갖가지. 이 일이 모두 이브의 유업이다. 그녀의 피가 영원히 여자의 혈관 속 을 흐르는 탓이다. 

좀더 귀한 일을 위해 태어났어야 옳았지 않았을까? 좀더 높은 가치에 집중하고 불태워야만이 생명의 보 람이 아니었을까? 

여자들은 단호히 질문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숨쉬는 공기의 전량엔 언제, 어디라도, 모정慕情을 선동하는마술의 미립자가 섞여 있다. 예서 살거나 아니면 살지 말아야 한다. 여인의 현장은 그만큼의 절대이다. 

사나이의 종별은 몇 가지나 되나? 

그냥 지나가는 역사驛舍처럼 다만 스쳐 지내는 남자들이 있다. 원경에서 근경으로 거리가 좁혀지면 미소를 띠우고 손을 흔들어 준다. 이내 다시 원거리의 풍 속에 희부여니 흡수되어 녹아 버리는 저들. 

"안녕, 형제들이여." 

도시 사람이란 누구나가 어여쁘고 소중한 것임을. 가슴이 뭉클하도록 격정이 치받는 몇 고비의 필연, 몇 번의 계기를 오랜 회상에 남기기도 한다. 

이십 년이나 된 남자 친구가 우연한 연석에서 뜻밖 의 고애告愛를 해오는 일도 생긴다. 농담이라곤 생각 하지만 언뜻 송구하고 고맙다. 불등의 불살모양 눈부 시지도 않고 푸근히 따습다. 

험구하는 남자 친구도 있다. 

대학 동창쯤이 같은 분야에 오래 일해 오다 보면 형 제같이 무관해진다. 모임이 끝나고 이차회라는 델 함 께 끌려가 앉았기라도 하면 허물없는 어리광을 피워 온다. 어이없는 말을 걸어 오면 대답도 막혀 그냥 웃 어 버린다. 어지간한 결례쯤 밉지가 않다. 철도 안 들 고 머리는 희어져 가고 그 인간적 자태가 보여주는 우 매의 공감이 가슴에 찡하니 철사줄같이 박힌다. 정답고 측은하고 사랑스러워 괜찮다면 껴안아 주고 싶다. 

어쩌다 생판 별외의 남자를 맞기도 한다. 그는 운명 의 남자이며 그를 만났을 때 지체 없이 뭔가가 일어났 었다. 모든 초의初意의 감동이 싱그럽게 꽃피웠다. 

자연을 상회하는 이적異蹟.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어 깨워 내는 변혁. 

사납게 몸서리쳐지는 연쇄적 충격. 

이는 절망의 진흙으로 이겨진 서름한 새 소망의 소 상塑像일 것도 같다. 

서툴고 신선한 가운데 횡포한 위압같이 다가선다. 

도망치고 싶다. 그 사람이 따라오는 한도까지 어째 도 도망쳐 간다. 저편에서 뒤쫓지 않으면 단연코 이쪽 에서 달려가는 기이한 숨바꼭질. 

이는 광기이다. 함부로 권할 수 없는 광란. 오직 칠 수 있는 피를 가진 사람들만이 천치처럼 뒤를 이어 미쳐보는 일이다. 

가슴의 통증이 실지로 일어난다. 진하고 야문 울혈 鬱血의 탓이다. 

정신 위생을 논하기 이전, 육체의 보건이 구체적으 로 위협을 받는다. 체질에 이변이 온다. 심장 정수리 에 깊숙이 못 하나가 박혀 든다. 당연히 출혈한다. 만 상에 그 사람이 꼭 있다. 만상이 모두 그의 배광이 된 다. 신의 자재自在가 그에게 대역을 맡겼는지 모른다.

착하게 순종하고 싶은 여자의 본능, 원하는 대로 먹여 주고 싶은 여심의 식단이 즐비하게 차려진다. 

음악을 들을 수 없다. 거짓말같이 눈물이 펑펑 쏟아 진다. 

정신의 근원지에서 오성悟性의 수정을 깨고 치솟는 영롱히 차가운, 이가 시린 눈물. 

눈물이 파종을 한다. 몇 줄기의 눈물이 삽시에 불어 나서 눈물의 무량한 범람을 이룬다. 전신이 젖는다. 수력으로 전기를 일구는 이치가 여기에도 들어맞는다. 한편, 설레고 발돋움만 해도 안 되지. 

땅 속 깊이 지축의 냉온을 살피고 천상, 혹은 지하, 어쩌면 먼 허공의 그 끄트머리에서 울려올지도 모를 계시의 음성에도 유념해야 한다. 

한낱 아슴한 묵시로써 무지개보다도 멀리, 그렇지, 가멸가멸 사라져 가던 유년기의 연처럼, 유년기의 낮 달처럼 그건 나붙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빛 깔, 어떤 형체로도 솟아나지 않을 수가 있다. 

불가해의 질문만이 뿜어 솟구치고, 하등의 해답은 없으려면 없겠지. 대답은 저편에서 와야 하는데 주어 야 할 사람이 거부하면 필경 그 무엇도 얻을 수가 없겠지. 

그러나 이때의 아픔이 여자의 영육을 또 키워 준다. 힘껏 잡아당기는 고무줄의 탄력, 반원의 활시위에 거는 생사의 그 긴박감. 

그 여자는 자란다. 해득의 탄원에 일어서고 대망待望 의 진실에 엎드리는 여자, 언제나 수용을 준비하며 문 을 열어 두는 그녀는 자란다. 아프면 아플수록 건강한 저항에 떠밀리는 그녀의 상처에선 연한 과육의 새 살 이 치민다. 

 

"남자 때문에 나는 죽는다." 

이는 전체 여성의 발언이며 절규일 것이다. 

순수한 내부에서의 만남, 정직하고 청신한 공감, 마 침내는 전인적全人的인 합일을 성취함이란, 비로소 동 가同價의 영혼을 맞이하는 경악이며 삶의 뜻을 다 채 운 지복至福의 증표라고 말하리라. 모든 여자는 이 일 을 갈망한다. 

좌절과 비탄과 회의의 반복 끝에 마침내 불을 담는, 질그릇 기름등잔의 점화의 약속. 모든 여자는 이 일을 꿈꾼다. 

그렇지. 사랑에는 본시부터 개체가 따로 없다. 

영감이 짚어 준 유일의 그 사람을 섬기며 미칠 듯이 그의 점유를 탐냄도 사실이나, 이때 저들은 이미 개체 의 허울에서 벗어나 단일에의 귀납을 해버렸다. 낱낱 의 성질은 소멸하고 둘에서 뽑아 낸 하나의 관능, 공동의 기구祈求, 그리고 혼란 없는 공유의 질서가 있을따름이다. 

이 혼융渾融의 비의秘義, 모든 걸 한 그릇에 풀어 넣 고 둘이서 적의適宜의 분식分食을 취한다. 절망도 허무 도 나누고 삼킨다. 시간에 있어서도 오직 동일한 값어 치의 그것을 한 냇물에 흘려 보낸다. 다만 이 사실은 의심하면 의심하는 즉시에 깨어져 흩어진다. 신앙의 원리와 매우 흡사하다. 

부재를 이겨낼 수 있나? 

둘이서 나누면 부재도 초월할 수 있나? 

하긴 이 일이 정작으로 문제이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함께 있을 때만큼 생동하는 시간은 없다고 말해 야지. 현실만큼 어여쁜 건 없다고 말해야지. 

사랑하면 기필코 함께 있어야 한다. 함께 있어야만 이 사는 일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선 하녀로라도 창녀 로라도 전락할 수 있다. 기쁘게 주저 없이 그러고만 싶다. 다만 저편 이를 훼손하게 될 것이므로 이 충동 을 무섭게 짓누른다.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사람이 된다.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된다. 

이때, 신의 칼끝은 종이를 베어 자르듯 둘을 갈라 지애도愛의 양 끝에 한 조각씩 걸어 둔다. 

허공에 울리는 쟁쟁한 못 소리. 줄어드는 시간조차 더 아깝게 함께 못박히는 그 못 소리. 표백하는 빨래 처럼 폭염 뙤약볕에 걸려, 언제까지나 그처럼 있다.

먼 길 이정표의 하얀 푯말처럼 매달려, 그렇게만 있다. 그래서 이브의 벌칙은 또 성립이 된다. 

사람의 급소를 가장 잘 아는 이는 조물주신 신이며 신의 형벌의 그 그물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는 어망임 을 우리가 안다. 단지 신은 또 하나의 어망을 가지고 계시다. 오뇌의 그물이 참담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 추세울 수 없는 상해로 숨져 가는 물고기들에겐 잠시 치유의 그물을 던져 이를 그 안에 건져 올리신다. 이 때 그네들이 받는 위로는 무엇인가. 

가장 많이 굶주렸던 것을 꼭 한 모금 얻어 마신다. 그 사내와 그녀가 영육간에 재회를 하고 잃었던 반신 을 잠시나마 성실히 살펴 어루만진다. 그러나 어째서 당연하기만 한가? 

새삼스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다. 

말이 필요치 않는 유순의, 오직 편안한 공감. 

그가 살아 있어서 눈부시다. 눈부시다. 눈부시다. 이 일이 전부이며 완미完美이다. 

처음부터 이별은 없었던 것이라고, 새삼스러이 그 실감에 몸을 떨며 흐느낀다. 이별의 흔적, 부재의 한 스러움은 어디에도 없다. 가장 멀리 있었던 육체의 사 실은 증발하여 없어지고, 시종 함께 지낸 영혼의 사실 만이 아무 소리 없이, 죄지은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져 있을 뿐이다. 

반응형